광주국제영어마을

   Thomas Kim 철학에세이:로고테라피로가는 첫번째 이야기
 
 : gjvillage  : 153 : 16-09-08 08:39:35  


허위의식과 가면의 인간

작은도마


흔히 현대인을 ‘야누스적 인간’이라 말한다. 야누스는 앞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다. 즉 ‘문의 신’으로 문의 앞뒤를 볼 수 있게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신이다. 문지기로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두 개의 얼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야누스가 현대를 사는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인간은 선악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선악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두 개의 얼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두 개의 얼굴은 곧 ‘가면’이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인간은 두 개의 가면만이 아니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에 맞게 그때그때 필요한 가면들을 꺼내 쓰고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 가면(Mask)의 어원은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사람의 ‘인격’(pers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중인격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현대를 사는 인간 중에는 다중인격자도 많다. 우리는 그(he), 그녀(her), 혹은 나(I), 너(You)의 모습 속에서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충격을 받고 당황하게 된다. 아! 그(he)에게도, 나(I)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하며 탄식 아닌 탄식을 하게 된다. 그 탄식이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절망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 가면들이 이성에 의해 잘 컨트롤 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인간이성이 갖는 기능이 다양하지만, 인간이성이 고유기능을 상실할 때 이같이 가면의 변조자가 된다. 이성에 의해 잘 조정한 가면은 대면관계에 순기능으로 그 역할을 다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면이 주는 허위의식은 진짜 그 사람의 모습으로 위장되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허위의식과 가면의 인간을 조작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한 특징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필자는 현대사회를 비극과 절망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단지 사회의 다양성이 다양한 허위의식을 재생산한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면의 조작이 주는 허위의식에 잘 적응하는 사람을 대개는 좋은 사람으로 평가 한다. 매너가 좋고, 쓰는 언어가 수준이 있고, 사람들을 대하는 표정과 몸짓이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가면의 다중인격자를 양성한다. 다시 말해서 학습과 문화를 통해서 세련된 다중인격자를 양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 역시 다중인격자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함과 세속성의 양극단을 달리는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현대 사회가 주는 가면들을 벗고 민낯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 아침에 가면이 주는 허위의식에 절망과 고민에 쌓인 글을 쓴다.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가?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곧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고민이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자신을 발견해가야 한다. 진정한 나의 토대위에서만 가면이 주는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에 대한 고민과 정초 없이 인간이성에 조종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은 언젠간 자신을 파괴할 비극을 탄생하게 한다.


필자는 최근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청년의 소식을 들었다. 양극성 장애는 조증과 우울증의 양극단을 달리는 현상이다. 적절한 조증은 삶에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극단적인 조증은 환각과 장밋빛 미래를 조작하여, 그의 가면을 망가지게 한다. 현실기반을 무시하고 자기초월의 극단의 모습을 조증은 허위의식으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자신이 신과 소통하는 자처럼, 혹은 자신의 인격을 지나치게 포장하며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의 가면은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고, 그 절망감이 그를 또 다른 극단의 감정인 우울증으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양극성 장애는 조증과 우울증의 극단을 향하게 된다.


필자는 왜 이 청년이 양극성 장애를 앓게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 청년이 기반하고 있는 ‘실존적 상황’(Existence Situation)이다. 그가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실존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함으로 나타난 증상이다. 인간이성의 조정에 순응하지 못한 가면이 벗겨지자, 그는 민낯으로 현실에 재등장한 것이다.

민낯의 그의 모습을 우리 사회는 받아드리지 못한다. 아니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민낯이 용납될 수 있는 감옥, 곧 정신병원으로 안내되었다. 세상은 이제 그와 소통할 수 없다. 그의 가면은 망가지고, 그는 조그만 두 평 남짓의 공간 안에서 그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가면의 조작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인간이성의 조정아래서 그때그때 필요한 가면은 잘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신이 우리에게 주는 형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이 아침에 현대가 주는 비극의 탄생을 바라본다.


나와 그 청년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나는 비교적 유연하게 가면을 벗고 쓸 수 있는 사람이고, 그는 이제 가면을 거부하고 민낯으로 살아가기를 외치는 자이다. 물론 그를 조종하는 것은 욕망의 그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가면을 잘 조작하며 허위의식을 잘 생산하고, 대면관계를 기술적으로 잘하는 사람과 그저 민낯의 모습을 보여주고 욕망의 외침을 뿜어 되는 그 청년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누가 정신병자이고 정상인가? 우리는 이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그 물음에 보다 진솔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로고테라피’(Logo therapy)이다. 삶의 의미 만들기, 그가 주는 치료약이다. 비록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지라도,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음을 여겨야 한다. 이것이 말의 역설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부조리, 가면, 허위의식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 존재의 고민을 시도해야 한다. 의미의 치유가 가져다주는 묘약을 위해서… 


# 왜 작은 도마인가? 필명은 토마스 김이다.

작은도마는 회의와 번뇌의 상징이기도 하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해서 손에 못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었던 도마. 그가 바로 나였다. 그 작은 도마가 이제 세상 속에서 가면의 조작을 힘들어하며, 그분(The Lord)께 나가고자 기도하는 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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