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국제영어마을

   고전읽기:데미안(헤르만 헤세)
 
 : gjvillage  : 217 : 16-09-06 08:29:53  


인문학강의

헤르만 헤세 『데미안』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한 인간-


싱클레어, 그는 한 세계 속에서 존재했던 아이였다. 그는 규칙과 관습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차칸’(?)아이였다. 안정된 가정에서 훈육되고, 선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노력했고 교육 받아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악을 만나게 된다. 크로머라는 또 다른 세계의 표상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크로머를 통해서 잠깐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 집, 종교, 도덕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의 좁은 세계는 데미안의 인도로 하나씩 깨지기 시작한다. 데미안은 아벨을 닮기 위해서 노력했던 싱클레어에게 ‘가인’의 용기를 알게 하였다. 그는 가인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이전에 알았던 가인이 아니 재해석된 가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인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신에게 항거하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동생을 죽인 가인. 그는 도덕과 규범의 파괴자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가인의 후예로 사는 방식을 알게 하였다. 가인은 나에게 있는 그대로,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 그대로 사는 자였다. 다시 말해서 데미안이 전하는 가인은 내면의 욕망이 인도하는 대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에게는 규범과 도덕이 중요하지 않았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였지만, 그는 성을 쌓고 자신의 문명을 개척해갔다.

 

데미안은 가인의 후예로 골로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제시하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좌우엔 강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세요!” 하면서 주님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끝까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조롱하며 자신의 욕망대로 죽어갔다. 데미안은 이 강도를 가인의 후예로 보고,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싱클레어는 그 동안 가보지 않았던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기존의 그의 세계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그에게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는 편지를 보내온다.

이 내용은 소설 데미안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메시지가 성장기의 소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알 껍질은 새의 억압이며, 구속이며, 관습이다. 그의 성장의 틀이며 동시에 구속인 것이다. 새가 새로 존재하기 위해서 알의 껍질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데미안은 그 아픔을 ‘투쟁’(Kampf)이라 말하고 있다. 투쟁은 싸워서 얻어내는 것을 말한다. 새가 알에만 머물면 죽게 된다. 높은 창공을 날기 위해서 반드시 알의 깨는 투쟁이 있어야 한다. 즉 데미안은 자유가 곧 투쟁임을 말하고 있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고 쟁취라는 것이다. 그런 자유를 얻은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아브락사스이다. 그는 신적이며 동시에 악마적인 신이다.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신이다. 아브락사스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아브락사스를 닮아가는 것이 자유임을 데미안은 말하고 있다.


왜 그것이 자유인가? 아브락사스는 두 세계를 합일해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깊은 아픔도 깊은 절망도 없다. 성스러운 것과 악마적인 것이 그 안에 있는 본성이기에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에게는 두 극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픔은 없다. 아브락사스는 신성과 마성, 남성과 여성, 인간성과 동물성, 선과 악을 자신 안에 완전히 갖춘 신비로운 신이다. 선과 악을 번뇌 없이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신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라고 말한다.


왜 헤르만 헤서는 데미안을 통해서 자유의 종착지를 아브락사스로 전하고 있는가? 과연 아브락사스가 우리가 가야할 자유인가? 아픔과 기쁨을 합일시키는 그곳이 과연 자유인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인간이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인류애를 지향하는 세계와 나의 이기적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세계, 두 세계 속에서 인간은 방황한다. 때론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이기기도 하고, 때론 다른 세계가 이전 세계를 이기기도 한다.


나는 날마다 이 두 극 사이를 방황하면서 살아간다. 나의 코끝에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나의 두 극 사이의 방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두 극 사이에서 방황과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자유는 두 극 사이에 방황하는 자에게 더욱 열망의 대상이 된다. 만일 우리 안에서 두 세계가 완전히 합일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방황은 없다. 고민과 번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에게 자유 역시 없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닮고자 했다. 그의 종말의 시간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닮은 그를 발견한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소설 데미안을 장식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싱클레어는 완전한 자유를 찾았는가? 나는 생각해 본다. 그는 아브락사스의 품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자유는 데미안도 아브락사스도 아니고, 종말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 즉 ‘죽음’만이 싱클레어에게 존재의 자유를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종말의 시간이 자유의 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데미안은 넘지 못한 또 다른 산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고 본다. 자유, 나의 내면의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그 자유는 결코 두 극 사이에 방황 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주제, 그것은 여전히 어렵다. 종말의 시간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종말의 시각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오늘도 껍질을 깨는 아픔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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